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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 두 과부의 사례를 통해 지나친 열녀 풍속에 대해 비판함.

<작가>

박지원 1737 ~ 1805
영, 정조 때의 문신, 학자. 본관은 반남, 자는 중미, 호는 연암. 이용후생학을 추구한 실학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관심 및 언행일치를 이룬 참된 양반.
작품: <열하일기>, <연암집>

<줄거리>

경국대전에서는 재가한 여자의 자식에게는 벼슬을 금하고 있다. 이 법은 벼슬을 하려는 양반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신분에 상관없이 수절해서 그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 심지어 벼슬과 상관없는 일반 평민들에게 조차 열녀 풍속은 강요되었다.

옛날 어떤 형제가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형제는 여론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의 벼슬길을 막아야 했다. 그 사람의 선조 중에 과부가 있는데 좋지 않은(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형제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인 너희가 어찌 과부를 논할 수 있냐면서 품속에서 윤곽도 없이 닳아진 동전 하나를 꺼내 보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동전을 보고 '죽음을 참게 한 부적'이라 말한다.

혈기 왕성했던 젊은 과부 시절 어머니는 정욕이 생길 때마다 동전을 굴렸다. 십 년 지나자 동전을 굴리는 숫자가 줄어들었고 혈기가 쇠약해진 후에야 비로소 동전을 굴리지 않게 되었다.
고독과 슬픔을 하소연할 곳이 없던 어머니는 그렇게 고통을 참으며 아들들을 벼슬길에 오르게 했다.
닳아빠진 동전을 이십 년 동안 간직한 까닭은 그 공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들은 형제는 어머니를 껴안고 울었다. 과부가 절개를 지키는 일은 그 당시 너무나 흔한 일이라 죽기 전에는 빛을 보기도 힘들었다.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함양 과부 박 씨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고 자결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아전 집안의 딸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19세에 함양의 아전에게 시집갔으나, 결혼한 지 반년도 못되어 남편이 죽고 말았다. 박 씨는 초상을 치른 뒤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다.

박 씨는 처음 정혼한 뒤 남편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집안에서 만류했으나 남편을 위해 처음 바느질한 옷을 지키려는 박 씨의 뜻을 알고 혼인을 시켰다. 그러나 결국 남편의 빈 옷만 지킨 셈이었다.
박 씨는 젊은 과부가 오래 살면 친척들의 동정을 받고 이웃사람들에게 추파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 년 상을 치르고 남편이 죽은 날에 죽어 기어이 절개를 지켰다. 이에 함양군수를 비롯한 세 명의 선비가 '열녀 박 씨'를 위한 추모글을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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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클루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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