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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박완서 1931 ~ 2011

전쟁의 상처와 가족, 여성, 소시민 등 시대의 아픔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에 관심을 가짐.

작품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목>, <자전거 도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한 줄 요약 >

 

서울 변두리에서 남매를 공부로 성공시키려는 억척스러운 엄마의 이야기.

 

< 줄거리 >

 

우리 가족은 개성 박적골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심한 복통으로 쓰러진다.

조부모는 병원에 가는 대신 탕약이나 굿 등의 민간요법으로 아버지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죽고 만다.

 

양의사가 치료하면 쉽게 나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안 엄마는 허무하게 남편을 잃는다.

엄마는 오빠가 소학교를 졸업하자 오빠를 데리고 대처(서울)로 떠난다.

어린 나는 조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박적골에서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몇 년 뒤, 엄마는 나 역시 대처(서울)로 학교를 보낸다며 데리려 왔다.

 

 

엄마는 나에게 항상 신여성이 되라고 말했다.

엄마가 생각하는 신여성은, 공부를 많이 해서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 집은 서울 문밖의 현저동 꼭대기에 있는 초라한 셋방이었다.

박적골 넓은 집에서 자유롭게 살던 나는 실망하지만, 엄마는 오빠가 성공하면 서울의 문 안에 들어가 살 거라며 나를 위로한다.

 

 

박적골에서 늘 도도하던 엄마는, 서울에서는 매사에 주인집의 눈치를 보며 늘 쩔쩔맸다.

엄마는 바느질품 팔이를 해서 오빠와 나를 키웠다.

비록 지금은 천한 기생의 옷을 바느질 하지만, 품위 있는 집안의 며느리였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을 상것들이라고 무시한다.

그리고 나를 상스러운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

 

 

이것저것 못하는 게 많았던 나의 생활은 무료했다.

어느 날 나는 땜쟁이 딸과 석필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 아이는 그림을 매우 잘 그렸는데 우리 집 담벼락에 여자의 성기를 그리고는 주인집의 할머니와 첩의 이름을 크게 써놓았다.

 

그 일로 주인은 나를 혼내지만, 내가 한글을 모른다고 오빠는 항의했다.

오빠의 말이 맞지만 그 말로 더욱 화가 난 주인은 다짜고짜 오빠의 뺨을 치며 욕을 한다.

자존심에 금이 간 엄마는 친가에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한다.

결국 엄마는 현저동 꼭대기에 여섯 칸짜리 기와집을 마련하고는 감개무량해하며 말뚝을 박는다.

새 집은 마당이 삼각형이라 우리는 그 집을 괴불 마당집이라 불렀다.

 

 

나는 땜쟁이 딸과 대궐 같은 붉은 담장 옆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거기서 나는 전중이(죄수)를 보게 된다. 엄마는 이제껏 딸이 놀던 곳이 놀이터가 아니라 감옥소 마당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한다.

그 후 문안에 사는 친척을 힘겹게 알아내어 나를 위장 전입시킨 후, 문 안의 매동 국민학교에 보낸다.

엄마는 내가 문밖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문 안, 문 밖 어디도 끼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다.

 

현저동은 산꼭대기라 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동네에선 물장수를 썼다.

동네 사람들은 돌아가며 물장수 영감의 밥상을 차렸는데, 밥상에는 대개 김치나 국 정도만 놓고 머슴 대하듯 영감을 하대했다.

그러나 엄마는 마치 잔칫상 차리듯 영감의 밥상을 극진하게 차렸다.

엄마에게 물장수 영감은, 물지게로 아들 둘을 전문학교에 보낸 품격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끝 무렵, 엄마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종종 옷 속에 쌀을 숨겨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마른 체구의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땐 마치 임산부 같았다.

당시 전쟁으로 쌀이 부족하던 시기라, 뚱뚱한 사람을 보면 순사들이 칼로 배를 찌른다는 괴담이 흉흉하던 때였다.

 

해방이 되고 오빠는 나름 성공하여 문안에 집을 장만해서 엄마의 오랜 소원을 풀어드렸다.

그 후 살림은 점점 불어 좋은 집으로 이사도 여러 번 하지만 우리는 현저동 괴불 마당 집을 잊지 못한다.

 

중년이 된 나는 우연히 현저동을 지나다가, 예전 집 근처에 새롭게 연립주택이 들어선 걸 발견하고는 허전한 마음이 든다.

나는 엄마가 생각한 신여성 보다 훨씬 세련되었지만, 신여성의 능력에는 훨씬 못 미치는 자신을 돌아보며 실소를 터뜨린다.

그리고 신여성이란 말은 마치 복원한 성벽처럼 옛것도 아니고 새것도 못 되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억지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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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클루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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